수평사 박물관 현장학습 해설 ⑥

야마다 고노지로 기념비(山田孝野次郎記念碑)

야마다 고노지로(山田孝野次郎)는 1906(메이지 39)년 2월 25일 가시하라 북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소인증’을 앓아 다른 사람보다 체격이 작았습니다. 그 때문에 의사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전국 수평사 창립대회에 당당히 등장하여 ‘교단에 선 선생님의 눈동자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차가웠습니다’고 하면서 공무원과 학교 교사를 비판하며, 그동안 자신이 느낀 모욕감과 배척으로 얼룩진 현실에 대해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회장에 모인 청중들이 오열하자 큰 소리로 질타하며 ‘지금 울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이 개탄스러운 현실을 깨부숩시다. 차별 없는 밝은 새 세상을 만들어갑시다’라고 외치자 회장은 박수로 떠나갈 듯했습니다. 이후 야마다는 연설 화술을 인정받아, 분주하게 전국 각지의 수평사 창립에 헌신하였습니다. 전국 수평사 제2회 대회에서는 ‘악마의 교실을 철저하게 규탄’하는 전국 소년・소녀 수평사 창설을 제안하였고, 전국 수평사 제4회 대회에서 전국 소년・소녀 수평사는 전국 수평사 최고 기관의 하나로 그 입지를 굳혔습니다. 또 야마다는 마쓰모토 지이치로의 심복으로 활약하며 후쿠오카에 거주하면서도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습니다.
그러던 중 1931(쇼와 6)년 3월 9일, 후쿠오카시 가네히라(福岡市金平)의 다카오카 미노루(高丘稔) 댁에서 스물다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규슈 수평사의 동지장(同志葬)으로 치러졌으며, 일주일 후인 3월 18일 그가 태어난 가시하라 사이코지(西光寺)에서 전국 수평사장으로 치러졌습니다.
비석이 세워진 장소 앞에는 이전에 와키가미(掖上) 마을 면사무소가 있었고, 이 면사무소의 서쪽 근방에 야마다가 다녔던 와키가미진죠초등학교(현재, 와키가미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비석 앞면에는 그의 이름인 ‘야마다 고노지로군의 비(山田孝野次郎君之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쇼와 6년 3월 9일 사망, 쇼와 11년 9월 전국 수평사 건립’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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