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사 박물관 현장학습 해설 ①

사이코지(西光寺)

1730(교호 15)년 10월 혼산(本山)에서 목불본존(木仏本尊)인 ‘아미타여래 입상’과 ‘사이코지(西光寺)’라는 사찰명이 하달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1748(칸엔 원년)년에 291평 부지에 칠간사면의 본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당시 이와사키(岩崎) 마을에는 단 38채의 세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2004년 12월 현재 550채).
본당 서쪽 끝에 걸려있는 북은 본래 낡은 공수 간[절의 부엌, 사무소] 2층의 태고당(太鼓堂)에 걸려있던 것으로, 북의 겉가죽에는 ‘유지 게이오 4년(維持慶応四年)’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연호는 새 가죽으로 교체한 연도를 의미하므로, 이 북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기 위해서는 북의 몸통 부분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다만, 현재 이 북 전체의 상태로 봐서 꽤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사이코지 건립 당시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대웅전 앞마당 포석에는 ‘아마코우[尼講: 비구니 계모임] 중’, ‘간사 기무라 미노, 이케다 도미(世話人 木村み乃 池田トミ)’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코우(尼講)란 오늘날의 불교 부인회 같은 것입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의 해방 센터나 집회소와 같은 모임 장소가 없던 시절이었고, 특히 혼무라와의 합병 문제와 학교 통합 투쟁 때 사이코지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마을 사람들이 사찰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사이코 만키치(西光万吉)의 묘비석에는 고세시 고바야시 출신으로 전국 동화교육연구협의회(피차별 부락민들의 차별 철폐를 위한 교육을 추진하는 교사들의 모임) 위원장을 역임한 니시구치 도시오(西口敏夫) 선생이 쓴 글과 사이코 만키치 본인이 쓴 수평사 선언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마이 기사쿠(駒井喜作)생가터

전국 수평사 창립 시 중추적 역할을 하고 ‘가시하라의 세 청년’이라고도 불린 사카모토 세이치로(阪本清一郎)・사이코 만키치(西光万吉)・고마이 기사쿠(駒井喜作)는 유년시절에 형제처럼 자랐습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카모토가 맏형, 세 살 아래인 사이코, 그리고 사이코보다 두 살 아래인 고마이 순이었습니다. 이들 세 명의 생가는 사이코지를 기점으로 사이코지 절 문 앞에 고마이 생가, 절의 동쪽으로 사카모토의 본가인 쇼야[庄屋, 에도 시대 마을의 정사를 맡아보던 사람, 오늘날의 촌장에 해당함, 특히 일본 간사이 지방에서의 호칭] 가옥이 그리고 그 동쪽으로 사카모토의 생가가 인접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 사람은 가까운 지역에서 함께 자랐습니다.
1921(다이쇼 10)년 가을에 고마이는 집 현관 옆에 ‘수평사 창립 사무소’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관헌의 감시가 심해지자 마을 변두리의 소가가와(曽我川) 강변의 오두막으로 간판만 옮겨서 관헌의 눈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평사 운동의 실질적인 준비는 고마이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카모토 기요토시(坂本清俊) 생가터(근대 이후, 본가는 사카모토(坂本), 분가는 사카모토(阪本)로 한자를 따로 구분하여 씀)

근세에는 ‘사카모토(阪本) 가옥’이라는 옥호(屋号)를 사용하였습니다.
300평 정도 남짓한 저택 네 곳의 모퉁이에는 창고가 있고, 두 칸 폭 되는 행랑채를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면 별채와 안뜰이, 안뜰 뒤편으로 뒤뜰도 있었습니다. 현관은 전쟁 후(제2차 세계대전)에 새로 지었지만, 전쟁 전의 현관은 사이코지 대웅전 앞마당처럼 널찍하고 기다란 계단이 딸린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저택 창고에서 이와사키 마을에 관한 방대한 문서자료가 발견되었습니다.
사카모토 기요토시의 생가터인 이곳은 “해방령” 당시에 이와사키 마을의 촌장이었던 사카모토 세이치로의 조부인 세이고로(清五郎)가 살던 곳으로, 후에 세이치로보다 스물여덟 살 위였던 사촌 형 사카모토 기요토시(坂本清俊)가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기요토시는 학교 통합 투쟁 등에서 민첩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며 마을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나라현 내의 여러 부락을 돌면서 ‘부락 아이들과 부락 밖의 아이들을 분리해서 교육해서는 영원히 차별을 종식할 수 없다. 통합해서 교육해야 한다’고 부락 학교를 폐지하고 본교로 통합해야 한다고 설득해왔습니다.
사카모토 기요토시는 1912(다이쇼 원년)년 8월 20일, 나라시 니시노사카(奈良市西之阪)의 묘코지(明光寺)에서 열린 창립대회에서 야마토 동지회의 부회장이 되었고, 이후에는 미나미가츠라기군(南葛城郡) 군의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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