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사 박물관 현장학습 해설 ②

사카모토 세이치로(阪本清一郎) 생가 터

사카모토 세이치로 생가 터는 세이치로 대에 와서 독립한 주거입니다. 안채가 있는 안쪽 앞 편으로 별채와 창고가 있고, 그 남쪽으로는 높게 굴뚝이 솟은 아교 공장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 집 창고에서 발견된 후 현재 수평사 박물관에 소장 중인 막대한 사료에서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사카모토 세이치로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카모토에 대해서는 ‘아교 공장의 사장 아들로 수평사 운동을 위한 자금조달 등의 재정을 담당하며, 수평사 운동을 뒤에서 조종하는 배후 조력자’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카모토가 남긴 자료에 의하면 조직 내부의 대립으로 분열 위기에 처한 전국 수평사 제4회 대회, 제7회 대회, 제10회 대회에서 분열 사태를 막기 위해 사카모토가 항상 애썼으며, 전국 수평사 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핵심 조직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수평사 운동의 평가는 아나키즘 파와 볼셰비즘 파의 이분법적인 평가밖에 없어서, 사카모토와 요네다(米田) 등 사회민주주의자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전국 수평사는 제16회 대회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당시 사카모토는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의 대립에 대해서 ‘울트라 칸무시[역주: 사카모토는 이 용어를 어떤 일이든 무조건 반대하는 신경질적인 사람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로 일축하고, 오히려 ‘형제애로 단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사진 필름에 쓰이는 얇은 젤라틴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 결과 필름 국산화의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사진용 필름으로 유리건판의 네가 필름을 사용하였지만,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셀룰로이드 롤식 필름이 개발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은 처음에는 영국령이던 중국의 청도, 상해 등에 체류하던 영국인을 비롯하여 프랑스인과 독일인을 통해서 롤식 필름을 수입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 정책을 펼치면서 무역이 단절되었고 필름 수입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침략국에 대한 사전조사 활동의 필요성과 전쟁에서 승리한 모습을 촬영하여 전의와 자국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파손에 취약한 유리건판보다 더 강하고 운반이 쉬운 셀룰로이드 롤식 필름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오늘날 후지 사진 필름의 전신인 대 일본 셀룰로이드 주식회사 등이 서둘러 개발에 착수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카모토는 자신이 경영하던 신슈 미나미 사쿠군 가와가미(信州南佐久郡川上村) 마을에 있는 ‘사카모토 공업소 가와가미 공장(阪本工業所川上工場)’에서 1937(쇼와 12)년에 필름 개발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1939(쇼와 14)년, 사카모토의 공장과 기술은 도쿄에 본사를 둔 ‘주식회사 일본화학공업소 가와가미 공장’에 매각되었습니다. 나아가, 후지 사진 필름이 투자하고 제휴한 이 회사 경영에 참여하였으며, 1941(쇼와 16)년 11월에 이르러 마침내 후지 사진 필름으로 흡수합병되면서 이 회사는 가와가미 공장으로 새롭게 출범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카모토는 직접 발행한 아교와 젤라틴 관련 서적도 다수 남겼습니다.
이처럼 사카모토는 수평사 운동에서 뛰어난 조직자이자 전국 수평사 운동을 견인한 인물이면서, 유능한 화학자이자 저술가로 다방면으로 활동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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